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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 Park Rehyun

고요하고 우아한 예술의 세계

박래현은 한국 화단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여성 미술가로, 동양화를 기반으로 다양하고 실험적인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판화와 태피스트리를 비롯해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바탕으로 기존의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아티스트였죠.

 

그녀는 1920년 한 유복한 집안에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평남 진대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여섯 살이 되던 해 전북 군산으로 이사를 오며 본격적으로 신여성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죠.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지나 경성여자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화가의 길을 꿈꾸며 1939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에 진학을 하게 됩니다.

 

재학 중 단장이라는 작품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며 화단에 데뷔한 그녀는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남편 김기창을 만나게 됩니다. 김기창은 당대 촉망받던 예술가 중 하나로 청각 장애를 딛고 화가의 꿈을 펼친 신화의 주인공입니다. 이 두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경성에 알려지자 엄청난 화제가 되기도 했죠. 도쿄 유학생 출신 부잣집 여인과 장애를 극복한 예술가의 만남이었으니까요.

 

박래현은 일본화를 전공하긴 했지만, 해방 후에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모색하며 혁신적인 예술 방향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미술계와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죠. 실제로 그녀는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계기로 남편과 함께 뉴욕에 정착해 태피리스트로서 역량을 넓혀갑니다. 평론가들은 이 시기 그녀의 작업을 20세기 미술의 선구적인 흐름으로 평가합니다.


결혼 후 남편과 꾸준히 부부 전시회를 개최해온 박래현은 국내 중진 미술가들과 함께 한국의 동양화 전성기를 이끌었고, 서울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힘쓰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쌓아 올린 박래현의 동양화 세계는 입체적인 형태를 해석하고 면을 분할하는 등 반추상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녀만의 독특한 경향성이 더해지죠. 이렇게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발병한 간암으로 1976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박래현이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천재 예술가라는 남편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던 그녀는 최근 열린 회고전 등으로 지금 가장 뜨겁게 대중들과 호흡하고 있습니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시절 새로운 미술을 개척하고,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완성해낸 그녀의 삶과 예술에 의미를 돌이켜 보면서 박래현의 작품을 살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