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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 Lee Hyun Jung

역동적 구성과 추상적 균형감

  

이현정 작가의 작품은 전경과 후경 모두에 적용된 역동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균형감이 있다. 재현적 요소의 비중이 크지 않은, 전 체적으로 추상적 화면이기에 이러한 균형감은 돋보인다. 실재감과 중력감이 있는 작품은 추상적이면서도 장식적이지 않다. 한편 몸에서 떼어낸 살점 같은 작품을 단위로 삼아 컴퓨터를 이용해 패턴으로 만들어 양탄자 무늬나 우표로 만든 또다른 작 품들에는 추상이 장식 및 기능(디자인)과 가지는 관계가 드러난다. 이러한 그림의 확장은 조형적 유희가 아니라 상징적 차 원을 가진다. 거기에는 개별과 사이의 갈등부터 동일자의 몸통을 이루는 타자의 위상이 포함된다. 칸딘스키를 비롯한 초기 추상 화가들이 가졌던 염려, 즉 참조대상이 사라지고 나서도 예술이 리얼리티를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이현정의 해법은 추상적 어법을 활용하면서도 현실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할 말이 많은 젊은 작가는 그림만 으로 충분치 않다는 생각에 서사 작업도 병행한다. 작가는 틈틈이 단편소설을 쓴다. 그렇다고 그림이 글의 삽화는 아니다. 텍스트는 그림과 상보적 관계에 놓인다. 작가는 그것을 소설 형식의 작업노트라고 말한다. 원래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쓰기와 그리기가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림과 소설의 내용은 작업 중심에 놓인 당면한 현실은 작가의 자의식부터 여성의 사회적 상황에 이르는 광폭의 범위에 걸쳐있다. 중간 톤으로 조절되어 있지만 청/홍계열의 색감, 즉 살색 섞인 붉은 계열과 블루 그레이가 주는 대결적이면서도 보완적인 부분이 특징적이다

 

대구를 이루는 형식에는 에너지의 흐름이 잠재해 있다. 그 한 가운데서 동양화의 시원한 필획을 떠올리는 검은 선의 출렁임이 있다. 하늘과 대지, 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징 색 은 조화롭게 어우러지지만, 이현정의 작품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조화가 아니라, 조화를 향한 과정 중에 생겨나는 갈등과 투 쟁이 전면화 된다. 무언가의 경계를 이루었을 듯한 검은 선이 내용물을 탈각시킨 채 혼돈에 가세한다. 회오리치는 검은 선 들은 기존의 경계가 와해되고 있지만, 새로운 경계가 확정되지 않은 과도기적 시공간의 궤적들이다.

 

검은 선들은 여린 담쟁이 손들처럼 단단한 판을 더듬으면서 나아가며, 무엇인가를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포획 이후에야 무엇을 원했는지 비로소 깨닫는, 다소간 맹목적인 투망(投網) 작업의 연속이 바로 작업이다. 때로 검은 선들은 쇠꼬챙이나 칼처럼 단단하다. 검은 선들은 체액이나 살을 떠올리는 형상과 상호작용한다. 이현정의 작품에서는 무엇이 절단 나는가. 작 가의 최근 관심사인 페미니즘은 전통적인 희생물이었던 여성을 주목한다. 이현정에게 모태언어라고 할 수 있는 먹으로 그 려진 선은 경계가 와해되고 구축되고 다시 와해되는 연속적인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푸른빛과 조화를 이루는 붉은 빛 은 그림과 더불어 제시되곤 하는 단편소설의 지원을 받아 선혈이 낭자한 분위기로 변모하곤 한다. ()지도부터 벽지같은 이미지까지, 상상과 현실을 아우르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는 인류 문명사에 늘 있어왔던 잔혹과 희생, 위반과 탈주가 자리 한다.

 

그러한 작업들은 작가에게 카타르시스와 치유적 효과를 주었다. 작가는 작업이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일깨워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매개 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