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예술가라는 이름의 무게, 이중섭의 삶과 그림

May 10, 2022

이중섭.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익숙할 이 이름은 이제 ‘화가’의 이름이 아니라 ‘유명인’의 이름처럼 느껴집니다.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을 불러봤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가장 마지막 가사를 담당하고 있는 이중섭은 그림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죠. 그렇다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렇게 오랜 시간 사랑받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걸까요?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외로웠던 화가,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자유를 꿈꾸던 예술가”


(생전 이중섭의 모습)

 

이중섭의 고향은 평안남도입니다. 당시 평남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중섭은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 스승의 영향으로 서구 예술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까지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하게 되죠. 처음 입학했던 학교는 도쿄제국미술학교였습니다. 하지만 1년 만에 그곳을 그만두고, 전위적인 분위기가 주도하던 문화학원 미술학부에 재입학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섭은 자신의 아내가 될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게 되죠.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에 입상해 평단을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뛰어들게 됩니다. 당시 자유미술가협회는 일본 추상미술의 중심과 같은 그룹이었는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김환기, 유영국, 박생광 등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중섭은 이후에도 이들이 수상하는 상을 받는 등 표현주의적인 작품으로 계속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학교를 마친 이중섭을 연인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일본에 두고 귀국을 하는데, 이듬해 그녀도 이중섭을 따라 한국에 와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 시기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 교직에 근무하다 전쟁의 영향으로 월남해 종군화가가 되기도 합니다. 다양한 활동 이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월남 이후에는 꽤 깊은 생활고에 시달린 것 같습니다.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등 고달픈 생활이 이어집니다.

 

 

“서글픈 예술가의 삶”


(흰소, 출처=Wikimedia)

 

이중섭과 가족들은 전쟁의 상황이 불안해짐에 따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가게 됩니다. 이후 생활고는 더욱 심해져 1952년 결국 부인인 마사코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죠. 이중섭은 이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사는 고통을 겪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때 작업한 작품들이 대부분 이중섭의 역작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소’ 시리즈 역시 가족과 헤어진 이후 통영에 머물며 작업한 것이죠.

 

이곳저곳을 떠돌던 이중섭은 1955년 상경한 뒤 미도파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전시회 반응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림을 제대로 팔지 못하고 그림 값을 떼이는 등 여러 문제를 겪으며 예술가로서 좌절과 실의에 빠지게 되죠. 결국 1956년 영양실조와 감염으로 고통을 겪다가 그해 9월,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가족도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술가, 그 무게를 견디는 법”


(출처=이중섭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한국 미술사에서 비운의 화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이중섭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고독하고 외로웠습니다. 약 300여 점 가량으로 알려진 이중섭에 작품에 어린이가 많은 것도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죠. 이외에도 그의 그림에는 소와 연꽃 등 전통적인 소재들이 많습니다. 이런 소재들을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하며 예술가 개인의 고통과 절망을 담고 있는 것이죠.

 

이중섭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대부분 앞서 언급한 ‘소’ 시리즈를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소를 표현하고 있는 강렬한 선은 예술가의 고뇌는 물론 개인의 갈망과 광기 등을 전부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론가들은 이중섭의 표현한 ‘소’는 단순한 소가 아니라 화가의 분신이며, 자신의 내면을 폭발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합니다. 고뇌를 뛰어넘는 희망과 의지, 힘 같은 것도 복합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이중섭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는 자유로운 선과 그 강렬함을 특징으로 꼽는데, 이런 특징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게 흔히 은지화라고 부르는 담뱃값에 그린 그림들입니다. 경제적 궁핍에도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던 화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어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죠. 1950년대는 이중섭이라는 개인에게는 너무나 외롭고 고달픈 해였지만, 예술가로의 재능을 가장 화려하게 꽃핀 시기인 것입니다. 

 

 

이중섭의 본격적인 회고전이 열린 것은 1970년대 이후입니다. 1980년대 중반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엔 1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몰리며 화단의 스타가 되죠.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위작 논란에 시달리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론 이중섭의 작품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가장 많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 혼란의 역사를 겪으면서 이중섭이라는 작가에 대한 기록들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죠. 예술가라는 무게를 견디며 살아왔을 이중섭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DITOR_유혜승 DESIGNER_고아라